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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또다른세상

단독 취재한 회장님의 ‘단독 드라이브’

지난 4월30일 경기 용인시 포곡면 유운리의 자동차 경주장 ‘스피드웨이’. 놀이동산 에버랜드 정문 앞에 있는 자동차 경주장이다. 에버랜드는 앞서 4월17일 안전상의 이유를 들어 스피드웨이를 폐쇄한 바 있다. 이 때문에 스피드웨이에서 열리던 각종 레이싱대회도 강원 태백으로 옮겨서 개최되고 있다.

»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이 4월30일 경기 용인 스피드웨이에서 전문 레이서를 옆에 앉힌 채 2009년형 벤츠 SL65-AMG를 운전하고 있다.

폐쇄된 경주장에 최신형 스포츠카 질주?

그런데 이날 오전 11시에 들여다본 풍경은 달랐다. 2125m 길이의 서킷(경주로) 위에서 메르세데스 벤츠의 검은색 2인승 로드스터 SL65-AMG 블랙시리즈가 봄바람을 가르며 미끄러지듯 달리고 있다. 450m 직선주로에 들어서자 ‘부아∼앙’ 하는 굉음과 함께 폭발하듯 가속한다. 350대만 한정생산하는 2009년형 ‘신상’이다. 공식 최고속도는 시속 318km로,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 도달 속도는 3.9초다. 아직 국내 공식 시판이 되지 않고 있는 이 모델의 차값만 32만달러(약 4억1600만원)에 달한다. 검은색 선글라스를 낀 운전자는 무표정하다.




같은 시간 서킷 중앙의 ‘피트’라고 불리는 큰 천막 아래 관리인으로 보이는 이들이 주차된 차들을 마른 걸레로 닦고 있다. 주차된 차는 벤츠와 포르셰부터 페라리, 람보르기니까지 최고급 스포츠카로, 모두 15대에 이른다. 가난한 스피드광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심박수가 1만rpm(분당 엔진회전수)까지 올라가는 수억원짜리 슈퍼카들이다.

단독 취재한 회장님의 ‘단독 드라이브’

로드스터 SL65-AMG 블랙시리즈가 피트로 천천히 들어와 멈춰선다. 운전석 문이 열린다. 두 남성의 부축을 받고 천천히 땅에 발을 내딛는 이는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이었다. 그는 좁은 보폭으로 천천히 걸으며 옆에 선 이들과 대화를 나눴다. 이 전 회장은 천천히 흰색 람보르기니 가야르도 옆으로 다가갔다. 국내 시판 가격 3억원이 넘는 슈퍼카. 레이서로 보이는 남성을 조수석에 앉힌 이 전 회장은 쏜살같이 서킷을 내달렸다. 이 전 회장은 람보르기니를 몰고 서킷을 쉬지 않고 10바퀴를 돌았다. 짧은 직선주로 뒤에 이어진 S자형 굴곡에서는 빠르게 돌다 안전펜스를 들이받을 듯한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급감속을 하기도 했다. 람보르기니 200∼300m 뒤로는 젊은 여성이 포르셰를 타고 따르고 있었다. 속사정을 아는 이들은 이 여성은 전담 간호사라고 했다. 만약의 사고와 건강상의 돌발 상황에 대비한 인력인 셈이다.

람보르기니에서 내린 이 전 회장은 이번엔 천천히 손을 들어 건너편에 주차돼 있던 포르셰 911터보를 가리켰다. 그가 모는 포르셰는 이전보다 한결 부드럽게 질주를 시작했다. 직선주로에 접어들면 급가속을 했다. 이 전 회장이 다시 피트로 돌아온 시간은 낮 12시25분께. 선글라스를 벗은 그는 다른 쪽에 주차돼 있던 검은색 포르셰 조수석에 앉았다. 간호사로 알려진 젊은 여성이 운전대를 잡았다. 포르셰는 봄 햇살을 가르며 스피드웨이를 빠져나갔다.

»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이 벤츠 SL65-AMG에 이어 람보르기니 가야르도 LP560-4를 몰고 스피드웨이를 질주하고 있다.

» 람보르기니에서 내린 이 전 회장이 다음번 탈 차를 고르고 있다. 그는 옆에 선 전문 레이서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다.

지난해 말 스피드웨이에 가림막 설치

이보다 조금 이른 같은 날 오전 9시, 스피드웨이와 삼성교통박물관을 잇는 길에 ‘부아앙~’ 하는 배기음이 울려퍼졌다. 전형적인 슈퍼카 소리였다. 시속 300km 이상을 달릴 수 있는 슈퍼카들은 출력이 약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머플러를 쓰지 않는다. 슈퍼카가 울부짓는 것은 그 이유 때문이다. 흰색 포르셰 뒤에 은색 포르셰 911터보, 그 뒤로 검은색 포르셰 911터보가 잇따른다. 색깔별 컬렉션 같았다. 그 뒤를 벤츠의 ‘별’이 선명한 검은색 SL65-AMG 블랙시리즈와 노란색 야생마 마크가 거칠게 도약하는 붉은색 페라리 F430이 뒤를 이었다. 이 차들은 잠시 뒤 스피드웨이의 피트에서 볼 수 있었다. 이건희 전 회장이 타는 슈퍼카들은 삼성화재가 운영하는 삼성자동차박물관 뒤편의 대형 창고에 보관돼 있다가 이 전 회장이 탈 때에 맞춰 스피드웨이로 옮겨진다고 한다.

그런데 스피드웨이 바로 곁에서는 이런 광경을 볼 수 없다. 스피드웨이를 늘씬하게 둘러싼 메타세쿼이아 나무장벽 아래로 2.5m 높이의 진녹색 인공 가림막이 3km가 넘는 전체 둘레를 에워싸고 있기 때문이다. 가림막 안이 궁금해서 기웃거릴라치면, 곧바로 경비 직원들이 달려와 제지한다. 폐쇄된 레이싱장을 들여다보는 것이 왜 금지될까?

스피드웨이 인근의 한 레이싱업체 관계자는 “스피드웨이 외곽에 녹색 가림막이 설치된 것은 지난해 11월께였다”며 “그때 서킷 위쪽에도 철조망이 설치됐다”고 말했다. 에버랜드 정문 앞에서 훤히 내려다보이던 레이싱장은 그때부터 외부에서는 들여다볼 수 없는 금단의 땅이 됐다.

» 이 전 회장이 포르셰 911 터보 차량에 탑승하고 있다.

경기장을 달려야 할 레이서들에게도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한 유명 레이서는 “지난해 8~9월부터 스피드웨이에서 연습하는 것이 제한되더니, 11월 이후로는 스피드웨이 이용이 아예 중단됐다”고 말했다. 종전에는 월요일 오후와 화요일을 제외하고는 선수들의 이용이 자유로웠다. 30분당 3만5천원의 이용료만 내면. 레이서들은 보통 시합이 있는 주에는 사나흘씩 스피드웨이에서 연습을 해왔다. 다른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레이싱도 트랙에 대한 감각을 익히는 것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용 불가 통보에 레이서들 ‘부글부글’

레이서들의 경기장 이용이 제한되기 시작한 때와 이건희 전 회장이 스피드웨이에 나타나기 시작한 시점이 거의 일치한다. 스피드웨이의 사정을 잘 아는 이들의 말을 종합하면, 이건희 전 회장이 스피드웨이에 처음 들른 것은 지난해 7월5일께였다. 이건희 전 회장은 지난해 4월22일 모든 삼성 관련 직위에서 사퇴한 이후 ‘자연인’ 상태였다.

삼성 관계자는 “지난해 7월 이 전 회장이 스피드웨이를 처음 들렀고,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들르기 시작했다”며 “가을 이후로 거의 매일같이 찾았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 전 회장은 스피드웨이 피트에 보통 10대 이상의 차들을 가져다 놓고 차를 바꿔가며 탄다”고 말했다. 스피드웨이 인근의 레이싱업체 관계자도 “이건희 전 회장이 지난해 8월부터 스피드웨이를 찾기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건희 전 회장이 스피드웨이를 찾는 날은 교통박물관에 있던 차들이 스피드웨이로 옮겨진다. 인근의 다른 튜닝업체 관계자도 “일주일에 서너 번 정도 슈퍼카들이 스피드웨이로 간다”고 말했다. 삼성커뮤니케이션팀은 “이 전 회장이 가끔 (스피드웨이를) 이용하는 것을 알고 있다”고 밝혔다.

» 이 전 회장이 포르셰 911 터보를 몰고 스피드웨이 경주로를 달리고 있다.

삼성 관계자는 “이 전 회장은 컨디션이 좋을 때는 오전과 오후 내내 레이싱을 즐긴다”며 “한번 차를 타면 보통 서킷을 10바퀴 정도 돈다”고 말했다. 4월30일에도 이 전 회장은 차를 바꿔 탈 때마다 서킷을 10바퀴 정도 돌았다.

레이싱업계가 반발하는 것은 에버랜드의 오락가락하는 방침 때문이다. 한 유명 레이서는 “스피드웨이 쪽에서 지난해 말에는 ‘2009년에는 공사 때문에 1년 내내 대회를 열 수 없다’고 했다가, 올 2월쯤에는 또 ‘할 수 있다’고 말을 바꿨다가, 3주 뒤쯤에는 ‘올해는 아예 할 수 없다’고 했다”며 화를 끓였다. 에버랜드 스피드웨이에서 레이싱대회를 열어온 레이싱단체 관계자는 “에버랜드가 공사를 한다고 해서, 우리가 어떤 공사를 할 예정이고 언제까지 할 예정인지 공문으로 밝혀달라고 요구한 바 있다”며 “그러나 에버랜드 쪽에서는 ‘공문으로는 줄 수 없다’고만 했다”고 말했다.

태백으로 옮긴 레이싱대회 ‘고전’

레이싱업계의 다른 관계자는 “용인 스피드웨이가 1995년 개장한 이후 많은 레이서들이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모터스포츠가 이제는 자리를 잡은 상황”이라며 “그런데 갑자기 레이싱장을 이용할 수 없게 되니 선수들은 손을 놓고 있고, 업계도 줄파산 지경에 놓이게 됐다”고 한숨을 쉬었다. 용인 일대에는 그간 40여 개의 레이싱 관련 숍들이 생겼다. 이 레이싱숍에서 선수들을 양성하고 레이싱카용 부품을 공급한다. 일반 차량을 레이싱용으로 튜닝하는 것이 주업이다.

» 레이싱을 마친 이 전 회장이 911 터보 카브리올레 조수석에 앉아 스피드웨이를 떠나고 있다.

지난해와 올해를 거치면서 이 중 10곳 이상이 문을 닫았다. 기다리다 못한 레이싱업계에서는 지난 4월 중순부터 강원 태백에 있는 ‘태백레이싱파크’에서 레이싱대회를 열고 있다. 그러나 태백까지의 거리 때문에 관람객 유치나 대회 참가 규모가 줄어 고심을 하고 있다. 용인의 한 레이싱숍 업주는 “폐쇄된 경기장에서 나오는 슈퍼카 소리를 들으면서 선수들은 가슴이 멍들어 허탈해하고 있다”며 “눈앞에 있는 경기장을 두고 강원 태백까지 가야 하니 오죽하겠냐”고 말했다.

삼성커뮤니케이션팀에서는 이에 대해 “스피드웨이는 레이싱 경기장의 특성상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경주용 차량들이 운행하는 곳”이라며 “지난해 말과 올해에 걸쳐 일본 최고의 안전전문회사로부터 두 차례의 안전진단을 받은 결과 안전 수준이 선진국과 현격한 차이가 있다는 판정을 받고 올해 레이싱대회를 전부 취소했다”고 해명했다. 삼성 쪽은 “안전진단 결과 주행로 노면 침하와 패드독(발차 대기소), 피트 등 부대시설 균열 등의 문제점이 발견됐다”며 “이에 따라 지반 침하 관련 공사, 노후 부속 건물 4개동 철거, 주행로 부분 포장, 주행로 균열 크랙공사 등 안전에 관한 공사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삼성 “안전상 문제로 공사 진행 중”

삼성의 설명대로면, 이건희 전 회장은 안전성에 문제가 있는 서킷에서 꾸준히 레이싱을 즐겨온 셈이 된다. 4월30일도 마찬가지다. 삼성커뮤니케이션팀 관계자는 이런 <한겨레21>의 문제제기에 대해 삼성의 공식 입장이라며 “안전진단 결과 문제가 있다고 해서 폐쇄했는데, 만약 이런 상태에서 경기장을 열었다가 사고가 나서 몇 명이 죽으면 어느 매체가 가장 심각하게 다루겠느냐”며 “단, (이런 상황은) 프로레이서들이 하는 경우고, 아마추어인 개인이 연습할 정도의 안전성은 되기 때문에 이 전 회장이 이용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한 레이서는 “(노면 침하가 있다면) 어느 누구라도 이용할 수 있겠냐”며 의문을 표시했다. 슈퍼카의 빠른 속도를 생각하면 당연한 의문이다. 삼성 쪽은 안전진단 자료와 스피드웨이 공사 현장을 공개해달라는 <한겨레21>의 요구를 거부했다.

한편 삼성은 일본의 전문 설계사가 스피드웨이 전면 개조를 위한 기본 설계를 마친 상태고, 5월 중순부터 본격적인 보수공사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삼성 관계자는 “스피드웨이가 전면 보수 공사를 마치고 국제 규격의 레이싱 경기장으로 새로 태어나면 레이싱업계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 아니냐”고 되물었다.

글 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